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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프레야!

8. 미닉은 테오미르를 관찰합니다

습작하면리또마스 2022. 9. 16. 12:25

Photo by June O
Photo by June O

 

그날 저녁.

하루를 거반 보내고 마침내 서로 합류한 일행은 재정비가 필요하다 결정하고 하루를 더 같은 자리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랄라는 주변을 살폈고, 프레야와 조르단은 식재료를 진득하고 정체 모를 수프로 연성하였다.

미닉이 잠자리를 준비하는 동안 테오미르는 밤새 지필 마른 가지를 모았다.

곧 그들 위로 또 다른 밤이 내렸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가 잠들고, 불침번을 마친 랄라가 테오미르와 교대한 직후 벌어진 일이었다.

테오미르가 먼저 랄라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슬레이어 동무.”

"말 걸지 마, 이 악마야. 난 이제 잘 거라구유."

 



랄라는 걸음도 멈추지 않고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에 기가 죽을 테오미르가 아니었다.

 



"혹시 페스카즈의 슬레이어라고 아니?”

 


랄라의 어깨가 움찔했다.

발걸음을 멈춘 그녀가 냉랭하게 테오미르를 쏘아보았다.

눈빛으로 칼날도 벼를 기세였다.

빙고!

테오미르는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나 달 알고 있기래?”

"무슨 수작이야?"

"수닥이라니..."

 


테오미르의 검은 눈동자 안에서 모닥불의 불꽃이 거칠게 일렁였다.

 



"갑다기 궁금해뎠다우. 기걸 동무는 달 알고 있는 거이 같고.”

"네게 말해 주고 싶은 건 조금도 없어."

“그-“

“요 만큼도."

 



 랄라는 엄지와 검지를 잔뜩 힘을 주고 맞대며 말했다. 

 



“개미 콧구멍만큼도.”

“기-“

“벼룩 똥구멍만큼도 없다고, 이 새꺙.”

“기-“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않는 게 좋아용. 그러고도 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

 



랄라가 확실하게 자기 할 말을 끝냈음을 확신한 테오미르가 다시 말했다.

 



“···기타고 치자요.”

 



모닥불에 마른 가지를 쑤셔 넣는 테오미르를 살피며 랄라는 미간을 모았다.

할 말은 없지만 들을 말은 있었다.

 



“그건 왜?”

“들리는 말로는 페스카즈의 슬레이어가 갖고 있던 페스카즈는 덩확히 세 자루였다우. 하나는 동무가 가덨고, 하나는 슬레이어과 함께 사라덨디. 하디만 마디막 한 자루..." 

 



테오미르는 일부러 뜸을 들였다.

 



"그건 어켔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냠?”

“동무, 사실은 기 행방을 찾고 있는 거이 아니간?”

 



랄라가 말이 없자 어깨만 으쓱했다.

 



"아니멘 말아라.”

“이 삥따 같은 악마 새낑! 이런 식으로 들쑤시고도 무사할 줄 알아용?”

 



흥! 욕하려면 얼마든지 욕하라지.

테오미르는 화도 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자신은 악마라 일컬어지는 마족 중에서도 고위급에 속하는 계급이 아니던가.

랄라가 종족 차별주의자가 되겠다면 그건 랄라의 문제였다.

테오미르는 자신의 악마 정체성이 한 점 부끄럽지 않았다.

···아니, 부끄러움 따위 느끼지 않을 작정이었다.

피도 눈물도 수치도 분노도 없을 작정이었다.

속으로 쓰디쓴 눈물을 삼키며 테오미르는 누가 뭐라든 자신은 자랑스러운 악마라고 생각했다.

 


"무슨 수작이냐구유!”

 


랄라가 꽉 깨문 잇사이로 낮게 말을 뱉어냈다.

성질을 건드렸는지 태도가 점점 더 위협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도발했다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눈이 확 뒤집힐 거 같았다.

그러나 테오미르는 굴하지 않았다.

아니, 굴하지 않는 척했을 뿐이었다.

얼굴에 떠오른 당당한 표정과는 다르게 다리를 달달 떨며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인 테오미르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말했잖네. 궁금한 거이 생겟다고." 

 



목소리가 모깃소리처럼 기어들어 가면서도 자존심은 있는지 씨익 웃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동무가 아는 걸 말하멘 날도 아는 걸 말함메."

 



사실 테오미르가 아는 건 개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궁금하면 못 참는 고약한 성미로 인해 오지의 교회에서 본 것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렇다더라도 설마 이렇게까지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 잘 들어맞을 줄이야.

테오미르는 당장에라도 돗자리를 깔아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네가 뭘 안다는 건데?"

 


랄라가 본격적으로 물었다.

 



“에헤이. 이거이 영 거래를 할 둘 모르는구만, 기래. 먼저 동무가 아는 거이를 말하라. 그럼 내래 아는 거이를 말함메."

 


개소리였다.

마찬가지의 결론을 랄라도 내린 듯했다.

 



"생각해 볼겡.”

 


그러고는 바로 자기 자리로 돌아가 눕는 랄라.

원하는 대로 일이 안 풀린 테오미르는 불침번 내내 승질을 죽이고 있다가 자기 시간이 끝나자 못된 성질머리 대로 미닉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고통과 놀라움에 벌떡 일어나던 미닉이 곧바로 짧게 신음하며 엄청난 압박이 느껴지는 머리를 꿩 새끼처럼 다시 바닥에 처박았다.

 


‘앜, 이놈의 저혈압.’

 



그의 상태가 안중에도 없는 테오미르가 툴툴댔다.

 


"뭘 꾸물대는 거이야? 동무 차례라우. 얼른 일어나라.”

"좀 얌전히 깨울 순 없는 거냐?"

"하암."

 


졸리지도 않으면서 테오미르는 길게 하품했다.

 


"어디서 개 딪는 소리가 다 들림네.”

 


저 놈의 고약한 성질머리하곤! 

역시나 악마는 악마였다. 

랄라였다면 맹렬하게 욕을 쏘아대며 지난 싸움에 이어 2차전을 벌였으리라.

그러나 미닉은 속으로만 화를 삭이며 비칠비칠 불가에 가 앉았다.

그러고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크게 기지개를 켜는데 그때까지도 잠자리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 테오미르가 주위를 얼쩡거리고 있었다.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며 달을 향해 노 젓는 시늉을 하듯 열심히 팔을 흔들었다.

 



'뭘 하는 거지?'

 



마족을 이토록 가까이서 지켜본 일이 없던 미닉은 테오미르를 관찰했다.

사실 테오미르가 하는 모든 행동이 관찰 대상이었다.
 
가령, 버섯 수프가 그랬다.

테오미르가 일행과 합류한 다음 날이었다.
 
프레야와 랄라가 끓인 미묘한 맛의 버섯 수프를 모두와 함께 후루룩 마시는 테오미르를 본 미닉은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먹는...거냐?"

 



테오미르는,

 


"심하게 싱겁긴 하다우.”

 



라고 받아쳐 여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버섯 수프뿐만이 아니었다.

테오미르는 매운맛이면 매운맛, 순한 맛이면 순한 맛 가릴 것 없이 카레를 잘 먹었으며 라면도 기가 막히게 잘 끓였다.

미닉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테오미르를 접할수록 그 혼란은 점점 더 가중되었다.

인간인듯 인간 아닌 인간 같은 테오미르.

그러나 그는 분명한 마족, 그것도 흡혈귀였다.

그만큼은 어찌해도 사실이었다.

 



“테오미르.”

 



상념에서 깨어난 미닉이 달밤에 신나게 몸을 불사르던 테오미르를 불렀다.

체조 동작도 멈추고 테오미르가 돌아보는 순간 미닉은 주머니에서 꺼낸 무언가를 던졌다.

그것을 또 테오미르는 거의 반사적이라 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입으로 받았다.

 



"웩, 퉤퉤!"

 



아니, 거품을 물며 빠르게 도로 뱉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미닉은 품속에서 두툼한 노트를 꺼냈다.

페이지를 휙휙 넘기던 그는 반 이상이 하얗게 남은 장에서 손을 멈춘 후 마지막 문장이 끝난 구간부터 무언가를 신들린 듯 기재하기 시작했다.


[XX 월 XX 일 XX:XX
건네준 마른 사막 쥐포를 왕성한 식욕으로 단숨에 먹어 치움. 더 없느냐며 더 많은 양을 요구. 네입식품사 홈페이지에서 찾은 해당 마른 사마 쥐포의 칼로리와 영양 정보는 다음과 같다···. 

XX 월 XX 일 XX:XX
요리하다 버린 콩깍지를 주자 면전에서 집어 던지며 몹시 화를 냄. 강렬한 거부 반응. 콩과식물은 못 먹는 것일까? 아니면 콩깍지에 대해서만 이런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더 많은 관찰이 필요하다.

XX 월 XX 일 XX:XX
조리하지 않은 생마늘을 던져....]


테오미르가 마족들의 방언으로 미닉을 향해 신랄하게 욕을 해댔다.

하지만 방금의 결과에 심취한 미닉의 귀에는 개 짖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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